이번 글에는 스타워즈 이야기에 관한 내용 누설이 있음으로 참고해서 읽기를 권유한다. 오늘은 부활절 방학의 “부활” 부분에 의미를 주는 날이다. 바로 예수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는 금요일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으니, 오늘 만큼 부활절 방학에 의미를 부여하는 날이 없다. 그렇기에 대략 2000년전쯤 유다 지방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선 예수와 바라바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이라고 배타적인 자세로 이 글을 바라보는 대신에 무언가를 새로운 관점으로 느껴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읽어 주었으면 한다.
영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학교의 신우회에 자주 나갔었다. 한번은 모임에서 강연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인포그래픽 형식의 유투브 동영상을 다 같이 보고 얘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바로 바라바와 예수의 재판에 관한 동영상이였는데, 역사적 설명을 덧 붙이자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예수를 유다 지방 총독 빌라도 앞에 재판을 서게 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성스러운 날에 죄수 한 명을 풀어주는 전통을 따라 예수와 살인자이자 반역을 이끈 바라바를 두고 유대인들에게 누구를 풀어줄 것인가에 관한 질문을 했을때, 이에 유대인들은 잘못이 없는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한 이야기에 관한 설교 였다. 여러가지 의미를 전달하는 설교 였지만, 나 한테 크게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바로 바라바가 단순히 그냥 범죄자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점이 였다. 이유 없이, 또 사람들이 나를 원하기 때문이라며 착각하며 죽음의 문턱에서 쉽게 걸어나온 바라바, 과연 그렇게 풀려나면서 예수에 대한 고마움이나 자기를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을까? 그렇다. 우리는 가끔씩 기독교인들이 칭하는 무조건적인 신의 사랑과 같은 은혜를 남에게 받으면서 감사의 존재를 잊고, 나의 뛰어남 이라는 착각에 남들의 베품을 당연히 받아들일때가 있다. 이는 오히려 괴멸감과 부족함이라는 느낌을 오히려 자신에게 부여하는 상황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 ‘뛰어남‘, 나의 ‘잘된 면‘, 나의 행동과 말을 통해서만 남의 ‘인정‘과 ‘칭찬‘, ‘배려‘를 받는다고 착각하기에 더 잘나야겠다는, 최고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번지고, 남의 작은 배려 하나가 이해가 안 되는 상태가 올 수 도 있는것이다. 남을 통해 나를 정의하기에 항상 부족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 내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지? 어째서 실수 투성이, 바보같은 나에게 이런 기회가 오고 이 사람을 왜 나에게 친절하지? 이런 회의적인 모습은 남의 베품을 나의 잘났음을 통한 당연성이라고 보는것 보다 흔하고, 또한 당연히 받아들였다가도, 잠시 생각을 해보면 많은 사람들은 이런 회의적인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이 질문들은 곧이어 바로 강박감으로 변한다. 꼭 무언가를 해야만 할것 같은, 업적을 이루어서, 강해져서, 곧바른 삶을 살아서, 무슨 이유든 무슨 행동이든 무언가 해서 그 배려를 정당화 시키려는 행동이다. 이는 내가 나 스스로에게서 많이 보는 현상이고, 문학작품과 영화등을 통해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상한 현상이다. 예를 들어 만약 요즘인기가 높은 우리나라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본다면 서상사의 느낌, 바로 자기 스스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 정당화된 관계를 직접 만들어가고 싶은 그 강박감에서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지위와상태를 사용해 그들의 관계를 그녀의 ‘배려‘로 정당화 시켰을때, 이해를 못하고 자멸감에 그 관계를 무너트리면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준것이다. 그 보다 특히 나는 영화 스타워즈가 바로 내가 여기서 설명하는 이 현상을 다룬 영화로 보고 있다. (여기서 부터 스포일러 주의!)
스타워즈는 간단히 요약하자면 아나킨 스카이워커라는 개인의 연대기를 다룬 영화이다. 노예로 태어났지만 제다이 전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간신히 얻으면서 항상 최고의 제다이가 되겠다며, 강해지겠다며, 아직 노예로 집에 남아 있는 엄마를 구해주겠다며 훈련을 하지만, 엄마의 죽음과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자만심에 훈련을 못 마치고 어둠의 길을 선택하여 다스베이더가 된다. 위에 설명한 내용을 제일 인간적으로 정리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는 실력과 능력면에서 탁월한데 왜 어째서 훈련을 끝내주지 않는지에 분노하고, 인정을 오로지 실력으로만 받으려는 부분은 배려와 사랑이 자기에게 주어졌을 때 남 보다 자신의 우월함과 잘났음을 인정하는 증거로 삼는 것 처럼 말이다. 아나킨의 행동은 이해가 간다. 노예에서 풀려나 제다이의 길을 걷게 됬으니, 스승에게 최대한 은혜를 갚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엄마와 스승의 사랑에 무언가 보여주어야 겠다는 강해져서 돌아와 은혜와 사랑을 갚으려는 강박감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특히 파드메와의 사랑 이야기는 더욱더 공감이 간다. 파드메는 아나킨은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나킨은 파드메의 죽음도 예견하고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하기에 파드메에게 빚진듯 증명하려는 듯 사랑을 한다. 파드메의 죽음을 예견하고는 파드메가 원하는 옆에 있는 존재, 남은 시간을 같이 행복하게 보내려는 생각보다 아나킨은 파드메를 사랑하기에 죽음을 이겨야겠다는 두려움과 분노로 있어 주지 못하고 죽음을 이기려는 여정에 떠난다. 그 와중에 다스베이더가 되는 것이다. 남은 나를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작고 간단한 것을 원할때가 많지만 우리는 가끔씩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가 왜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는 것이지 하면서 잘 보이려고 행복하게 해주려고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뒤에서 노력하고 무언가 큰것을 해주고 싶고 무언가를 해야 될것 만 같은 강박감 속에 살 때가 많다. 부모님의 사랑 앞에서도, 결과적으로는 내게서 건강과 행복만을 원하시는데 이상한 강박감에 뭐든지 잘해서 보여드려야 할것 같고, 무언가 깜짝 놀래켜드릴려고 준비하다가 도중에 그 비밀이 탄로나면 원래의 사랑의 마음이 사라지고 화로 번질때도 있다. 이성과의 관계 속에서도 가끔은 우리는 서로 잘 해주려고 하고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나의 욕심인지 아닌지 봐야 할 때가 있다. 상대방은 기다렸다가 내가 노래를 지어주고, 큰 선물을 해주는 것 보다 지금 당장 그냥 옆에 있어 간단히 포옹을 원할 수도 있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무엇 보다 기다림이라는 것은 아픔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주로 욕심에서 비롯 되는 남을 위해 무언가 해주어야 겠다는 강박감은 상대방을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 스스로 준비를 해야되기 때문이다. 다스베이더도 결국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아들의 출산과 죽음에 같이 있어주지 못하고 잃게 됬다. 파드메와 아나킨 둘 다에게 결과적으로 큰 아픔과 슬픔만이 남은 것이다. 파드메는 이 와중에서도 아나킨 그의 안에는 선함이 남아있다고 말하면서 끝까지 신뢰를 잃지 않았다.
이 처럼 우리는 이유없는 사랑에 대해 배려와 은혜에 대하여 잘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해주려는 것보다 필요한 곳에 있어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야기의 끝에 다스베이더는 아들 루크와 대면하게 된다. 루크는 자기 아버지에게 선한면이 남아있다는 것을 주장하며 싸우기를 거절한다. 강해지려는 강박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 심지어 죽음도 이기려던 강박감의 상징인 검은 갑옷 속 어딘가에 파드메를 사랑햇듯이 자기를 사랑하는 아빠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루크의 이런 이유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에 이번에는 다스베이더가 과거의 실수를 다시 범하는 대신, 그 배려에 고마움을 표현하고, 아들 대신 죽게 된다. 죽기 전 아들에게 투구를 벗겨달라는 요청은 이제 그 강박감에서 벗어나 아빠로서 아들을 바라보고 죽겠다는 바로 사랑과 구원을 인정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다스베이더, 그의 헬멧 안에는 선한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제일 정직한 모습, 갑옷으로 감싸진 강박감에 둘러쌓인 짐꾼이 아닌 자유로운 선한 영혼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무덤이 비어있었던 이유는 예수의 본 모습, 제일 정직한 모습은 시체 상태의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우리는 때때로 남이 나에게 칭찬을 하거나 무언가를 해주면 이상하게도 죄책감과 비슷한 느낌에 ‘미안‘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마치 나에게 온 이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을 나는 다시 너에게 못 해 줄 수도 있으니 ‘미안‘이라고 하는 것 처럼. 정말 이렇게 생각하면 ‘미안해‘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말이다. 용서를 구하는 말이지만, 남의 배려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표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보다 우리는 미안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행동을 항상 조심하며, 더 자주 써야 되는 말은 ‘고마워‘가 아닐까?
부활절 금요일, 하나님의 구원에 왜 나 같이 나쁜 사람이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그 보다 더 중요한 생각은 감사의 생각인 것을 깨달으며, 자유롭게 살자는 다짐으로 이 글을 마친다.